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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O에서 잘려나간 절반

10월 6일
6분 분량

기업은 일하기 위해 모인 곳이다. 이 명제에서 모든 것이 출발한다. 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머릿속에 담아두면 그만이지만, 수십 수백 명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하는 순간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그 일들이 서로 어긋나지는 않는지, 우리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 — 이것을 감으로 알 수 있는 조직은 없다. 그래서 조직은 필연적으로 일을 관리하는 제도를 갖게 된다. 목표를 세우고, 나누고, 점검하는 장치. 우리가 'MBO(목표관리제도)'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이 제도를 처음 세상에 내놓은 사람이 붙인 이름은 사실 우리가 아는 것과 조금 달랐다. 피터 드러커가 1954년 《경영의 실제》에서 제시한 온전한 표현은 "목표와 자기통제에 의한 관리(Management by Objectives and Self-Control)"였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MBO'는 그 이름의 앞쪽 절반이다. 뒤의 절반 — '그리고 자기통제' — 은 지난 70년의 세월 속에서 조용히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그 절반이 장식에 불과했다면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 제도의 심장이었다.


드러커의 생각은 이랬다. 구성원 각자가 상위 목표를 제대로 이해하고, 거기에 기여할 자기 목표를 스스로 세우며, 그 진척을 스스로 점검하고 관리한다면, 조직은 일일이 감시하지 않아도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 여기서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각자의 목표가 상위 목표에 연결되므로 '정렬'이 생기고, 그 목표를 스스로 세웠으므로 '자기주도성'이 살아난다.


이 설계가 놀라운 이유는, 대부분의 조직이 이 둘을 서로 맞바꿔야 하는 타협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두면 제각각 흩어지고, 한 방향으로 모으려면 위에서 눌러야 한다고 믿는다. 드러커는 그 교환 조건을 거부했다. 정렬과 자기주도는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둘을 한 제도 안에 묶어내는 장치가 바로 '자기통제'였다.


이것은 감상적인 주장이 아니라 냉정한 계산이었다.


첫째, 정보는 늘 아래에 있다. 그 일을 실제로 수행하는 현장의 사람이 가장 잘 안다. 무엇이 병목인지, 어디를 손보면 풀리는지, 지금의 계획 중 무엇이 현실과 어긋나는지 — 이것을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은 위가 아니라 현장이다. 목표를 위에서 정해 내려보내는 순간, 조직은 자기가 가진 가장 좋은 정보를 스스로 버리는 셈이 된다.


둘째, 지식노동은 감시로 관리되지 않는다. 드러커가 '지식노동자'라는 말을 창안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대목은 자연스럽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사람의 산출은 눈으로 보이지만, 생각하는 사람의 산출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오늘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지, 대충 넘어갈 수도 있는 대목에서 한 번 더 파고들었는지를 감독자는 알 수 없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스위치는 바깥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다. 그러니 지식노동을 관리하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방법은, 그 사람 스스로 자신을 관리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셋째, 통제에는 언제나 값이 매겨진다. 감시하려면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고, 보고서를 검토할 회의가 필요하며, 회의를 준비할 자료가 또 필요하다. 통제가 촘촘해질수록 조직은 바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 시간을 쓴다. 반면 스스로 관리하는 사람에게는 그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다. 자기통제는 도덕적인 선택이기 이전에 값싼 선택이었다.


드러커가 굳이 이 구절을 제도의 이름에 못 박아 둔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목표관리가 언젠가 상부의 통제 도구로 변질되리라는 것을 정확히 내다보고 있었다. 이름에 새겨 두면 잊히지 않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빗나갔다.


하지만 그 빗나간 과정을 좇아가다 보면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대목도 있다. 지난 70년 동안 성과관리 제도는 한 번도 가만히 멈춰 서 있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끊임없이 느꼈고, 끊임없이 고쳐 썼다.


먼저 '측정'의 문제가 왔다. 목표를 관리하려면 재야 하고, 재려면 숫자여야 했다. 그래서 지표가 정교해졌다. 그러다 숫자가 재무 성과에만 쏠린다는 반성이 나왔고, 1990년대에는 균형성과표(BSC)가 등장해 고객, 프로세스, 학습과 성장까지 지표의 지평을 넓혔다. 옳은 방향이었다. 다만 그 결과 사람들이 관리해야 할 지표의 가짓수도 함께 늘어났다.


다음은 '변별'의 문제였다. 모두가 목표를 달성했다고는 하지만 성과에는 차이가 있으니, 줄을 세워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다. 상대평가와 등급 강제 배분이 자리를 잡았고, 하위 몇 퍼센트를 매년 걸러내는 방식까지 나왔다. 이제 목표는 평가의 근거가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기통제'는 사실상 숨이 끊겼다. 자기가 세운 목표가 훗날 자신을 심판하는 자료가 되는데, 누가 그 목표를 정직하고 도전적으로 세우겠는가.


그러자 반작용이 왔다. 인텔에서 시작해 실리콘밸리로 퍼진 OKR은, 야심 찬 목표를 세우게 하려면 목표를 평가에서 떼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목표는 도전의 언어이고 평가는 결산의 언어라는 것. 2010년대에는 아예 연례 고과를 폐지하고 상시 피드백과 잦은 체크인으로 방향을 튼 기업들이 줄을 이었다. 일 년에 한 번 등급을 매기는 대신, 자주 만나 대화하자는 취지였다.


이 흐름을 되짚어보면 하나의 패턴이 보인다. 지표를 넓히고, 줄을 세우고, 다시 그것을 풀고, 대화의 빈도를 높이고 — 모두 다른 처방이었지만 겨냥한 병은 단 하나였다. 목표가 사람의 것이 아니게 되는 병. 70년의 시행착오 끝에 되돌아온 자리는, 드러커가 처음에 이름 속에 적어두었던 바로 그 절반이다. 우리는 먼 길을 돌아 다시 같은 문 앞에 서 있다.


그렇다면 왜 그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 걸까. 여기서 흔히 "제도가 잘못 운영되고 있으니 원래대로 돌려놓자"라는 상투적인 결론으로 넘어가기 쉽다. 하지만 이런 말은 현실에서 별 힘을 갖지 못한다. MBO가 통제 도구로 흐르는 것은 누군가의 악의나 무능 때문이 아니라, 가만히 두면 자연스레 그렇게 되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힘이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첫째, 측정하기 쉬운 것이 이긴다. 달성률은 표에 넣을 수 있지만 '스스로 세웠는가'는 표에 담을 수 없다. 조직은 표에 들어오는 것만을 관리하려 한다. 둘째, 평가가 목표를 끌어당긴다. 목표가 보상과 연결되는 순간 사람들은 몰입 대신 방어를 선택한다. 낮고 안전한 목표를 협상하고, 유리한 것만 담으며, 실패 가능성을 감춘다. 자기주도성은 이 인력장 안에서 가장 먼저 부서지는 부품이다. 셋째, 불안은 언제나 통제를 선택한다. 리더가 압박을 느낄수록 확인의 빈도는 올라간다. 점검이 늘수록 스스로 관리하던 사람은 관리당하는 사람이 된다. 아무도 그러기로 결정하지 않았지만 상황은 자연스럽게 그리 흘러간다.


그러니 본래의 정신을 지키는 일은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매년, 매 분기, 매 대화에서 다시 시도해야 하는 일이다. 물살은 언제나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힘이 빠질 수도 있다. 구조가 그렇게 짜여 있다면 개인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를 떠올려 본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오르는 것은 자신의 본성을 억지로 거스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본성을 따르는 일이다. 편한 물살을 따라 떠내려가는 것도 물고기의 성질이지만, 태어난 자리로 돌아가 다음 세대를 남기는 것 역시 물고기의 본능이다. 연어는 그중 더 근본적인 쪽을 선택할 뿐이다.


목표를 함께 세우고 스스로 관리하게 돕는 일도 그렇다. 조직의 관성에는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의 본성에는 오히려 순행하는 일이다. 자기 일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는 것,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 하는 것, 해냈다는 감각을 얻고 싶어 하는 것 — 이것은 우리가 새로 만들어 넣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이미 사람 안에 있는 힘이다. 리더가 할 일은 없던 힘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눌려 있던 뚜껑을 열어주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이 싸움은 생각보다 승산이 있다. 우리는 사람의 본성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을 등에 업고 조직의 관성 하나를 상대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승산을 한층 높여주는 연구 결과가 하나 있다. 목표설정이론은 오랜 기간 '누가 목표를 세우는가'를 물어왔다. 위에서 부여한 목표, 함께 논의해 세운 목표, 스스로 세운 목표 중 무엇이 가장 효과적인가. 직관적인 답은 뒤로 갈수록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가 보여준 결론은 조금 달랐다. 부여된 목표라 할지라도 그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와 함께 전달되면, 함께 세운 목표 못지않은 몰입과 성과를 낸다는 점이다. 반대로 형식적으로는 대화에 참여했더라도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면 몰입은 생기지 않았다.


이 발견의 함의는 결정적이다. 목표의 힘을 가르는 것은 '누가 세웠는가'라는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그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는가'하는 심리적 수용이라는 것. 이것을 내면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은 리더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조직의 목표 대부분이 위에서 내려온다는 사실은, 흔히 자기주도를 포기해야 할 이유로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목표를 누가 정했는가는 대개 바꿀 수 없을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수용되는가는 리더가 바꿀 수 있다. 인사 제도를 개정할 권한이 없어도, 평가 체계를 손댈 힘이 없어도, 그 일은 오늘 할 수 있다. 다음 목표 면담 한 번을 다르게 여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대화에는 네 가지 움직임이 있다.


첫째, 이유와 의미를 나눈다. "위에서 정했으니까"라는 말은 내면화를 죽이는 말이다. 대신 이 일이 왜 중요한지를 진정성 있게 나눈다. 이 일이 고객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직의 방향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왜 하필 지금이어야 하는지. 사람은 이유를 납득할 때 비로소 목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납득이 바로 내면화의 출발점이다.


둘째, 개인의 가치와 성장에 연결한다. 같은 목표라도 그것이 자신이 지향하는 모습, 배우고자 하는 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만날 때 훨씬 깊이 내면화된다. "이 일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어떤 성장을 이루고 싶은가?", "이 일이 당신이 가고 싶은 방향과 어디서 만나는가?" 조직의 목표와 개인의 목표가 교차하는 지점을 함께 찾는 과정이다.


셋째, 방식과 경로에 선택권을 준다. 도달해야 할 도착점과 기한이 고정되어 있어도, 거기 가는 길에는 선택의 여지를 둘 수 있다. 어떤 순서로 할지, 어떤 방법으로 풀지, 무엇을 먼저 볼지를 직접 설계하게 하면, 부여된 목표는 '내가 방식을 직접 정한 목표'로 재탄생한다.


넷째,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함께 세운다. 아무리 의미 있는 목표라도 스스로 해낼 수 없다고 느낀다면 내면화되지 않는다. 과거의 성취를 상기시키고, 큰 목표를 감당할 만한 단위로 쪼개어 작은 성공을 설계하며, 필요한 자원과 발판을 함께 마련한다. 처음 가는 영역이라면 목표 자체를 '성과를 내라'가 아니라 '가능한 방법을 탐색하라'로 바꾸어 주는 것이 낫다. 지금은 헤매는 것이 자연스러운 단계임을 인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비로소 그 일에 들어설 수 있다.


가능하다면 대화의 끝에서 목표 문장 자체를 함께 다듬는 것이 좋다. 자신의 언어로 목표를 직접 표현해 볼 때, 목표는 비로소 '내가 하기로 한 일'이 된다.


한 가지는 분명히 짚어두어야겠다. 이것을 '상대가 목표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설득의 기술'로 읽으면 안 된다. 이유를 정직하게 납득시키는 것과 은밀히 조종하는 것은 다르다. 사람은 조종하려는 의도를 정확히 알아챈다. 목표에 대한 상대의 의문이나 이견 역시 설득으로 눌러버릴 것이 아니라, 함께 다루어야 할 정보로 대해야 한다. 때로는 그 이견이 목표를 더 낫게 만든다.


드러커 자신도 훗날 MBO를 두고 만능 해법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도구는 손에 쥐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물건이 된다. 같은 칼이 요리를 만들기도 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하듯이. 제도의 끊어진 정신을 다시 이어 붙이는 일은 결국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이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리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다. 목표를 내려주는 대신 함께 의미를 찾고, 감시하는 대신 묻고, 숫자 너머의 방향을 이야기하는 것 — 단 한 번의 대화를 다르게 시도하는 것뿐이다.


연어는 강 전체를 한 번에 오르지 않는다. 눈앞의 여울 하나를 넘고, 그다음 여울을 넘는다. 그 방식으로 결국 상류에 다다른다.


다음 목표 면담이 바로 당신이 넘어야 할 하나의 여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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